李世昌
(1882) ~ 1910-10-31·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세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더니 급기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은 국망의 사태에 직면하자 이세창은 1908년 전남 남평에서 거의한 심남일(沈南一) 의진에 참여하여 군량장(軍糧將)으로 활약하였다. 심남일 의병장은 김준(金準 : 金泰元)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김준과 김준의 아우 김률(金聿)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의병 진용을 재정비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세창은 군량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 의병부대는 같은 해 3월 강진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접전을 벌여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며 기세를 떨쳤다. 이후 이들은 남평 ‧ 능주 ‧ 영암 ‧ 나주 ‧ 장흥 ‧ 해남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는 1909년 3월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함께 수십명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친일 밀정과 관료들을 처단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지는 가운데 거듭된 전투로 의병의 전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의병부대의 연합 전선을 주장하면서 안규홍(安圭洪)의 의병부대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천동(泉洞)에 주둔하고 있던 보성 의병장 안규홍과 석호산(石虎山)에서 의병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무렵 이세창의 휘하에는 100여 명의 의병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계획에 따라 호남의 의병들에 대해 공세를 가해오자, 이세창은 휘하의 의병을 구출하기 위하여 1909년 9월 자수하고 말았다. 그는 1919년 5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강도 및 모살로 사형을 받아 같은 해 10월 3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9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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