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壽興
(1905) ~ 1929-02-27·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成檀, 李聖佐, 李佐聖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수흥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2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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