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基
1890-09-02 ~ 1948-04-2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순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경남도 함흥(咸興)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을 이용하여 한영호(韓泳鎬)·이근재(李根載)·이영화(李榮華)·조영신(趙永信)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2월 26일 평양숭실중학교(平壤崇實中學校) 교사 강봉우(姜鳳羽)가 함경도와 간도(間島)지방을 순회하고, 신창리(新昌里) 교회에 들려, 제1차 세계대전이후의 국제 정세와 한국의 정세를 알리면서부터 계획되었다. 또한 원산(元山) 광석동(廣石洞) 교회의 장로 이순영(李順榮)이 중하리(中荷里) 교회에 와서, 원산에서는 3월 1일 거사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이에 기독교청년회 서기인 그는 교회 간부들과 숙의한 끝에 이근재·한영호·이영화 등과 집행위원이 되어, 만세시위 일자를 장날인 3월 3일로 결정하였으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등사하기로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투옥자의 생활비·변호인 선정 등의 문제를 담당하였다. 또 만세시위에 소요되는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주동자를 중심으로 각기 5원 내지 1백원씩 갹출하였다. 한편,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의 3·4학년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에서도, 서울의 학생대표인 강기덕(康基德)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3월 1일 간부회의를 열어 12인의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튿날에는 권영주(權永周)의 집에 모여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西咸興) 역전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같은 이같은 계획과는 달리 3월 2일 주민들의 자발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이 3월 3일 새벽에 예비 검속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기독교계 주동자와 함산학우회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함흥기독교청년회 총무·신간회(新幹會) 부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농촌 문맹퇴치운동·청소년 체육·교육운동·민족계몽운동 등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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