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時連
1888-10-18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시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중국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검찰원(檢察員)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독립단은 3ㆍ1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ㆍ향약계(鄕約契)ㆍ농무계(農務契)ㆍ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운동(義兵運動)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각 단체를 해산하고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를 이념으로 하였다. 본부는 유하현 삼원보에 두었으며,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부총재는 백삼규(白三圭)였으며,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總團)이 있었는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ㆍ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였다. 국내외에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 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는 관구(管區)를 설치하고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환인(桓仁)ㆍ장백(長白)ㆍ무송(撫松)ㆍ임강(臨江)ㆍ관전(寬甸)ㆍ집안(輯安) 등 10개 현에 지단을 세웠다. 이시연은 1919년 5월 삼원포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에 입단해 검찰원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단무(團務)에 종사했다. 같은 해 음력 10월 15일 집안현(輯安縣) 이마구(二馬溝) 근처 산중에서 일제 밀정 최경태(崔京泰)를 단원 이용규(李龍奎) 등과 화승총으로 사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5년 9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살인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3년 2월 19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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