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泳萬
미상 ~ 1910-05-07·조선
이명·자·호 李榮萬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영만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일제는 1905년 화폐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더니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평민 의병부대가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이영만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10년 3월 정인국(鄭寅國)의병진에 가담하여 황해 평산(平山), 금천(金川)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인국 의병장은 1905년 황해도에서 기의하여 의군본부(義軍本部)의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나인영(羅寅永) 등의 을사5적 처단계획에 합류하여 거사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10년 국망이 가까워오자 재차 거의하여 황해도 평산의 이진룡(李鎭龍)의진과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영만은 정인국 의병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등 활동하다가 1910년 5월 7일 평산군 용산면(龍山面)의 산중에서 평산군 온정면(溫井面) 및 금천 헌병분견소 헌병대와 교전 끝에 정인국 의병장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6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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