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永釗
1901-03-04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영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면사무소, 우정면 면사무소, 화수리(花樹里) 경찰관주재소 등에서 전개된 3.1운동을 주도했다. 4월 3일 오전 8시경 장안면 석포리(石浦里)의 이영쇠 집으로 찾아온 차희식(車喜植)・장제덕(張濟悳)・장소진(張韶鎭) 등이 “오늘 면내에서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다. 나와서 참가해야 한다”며 만세운동 동참을 권유했다. 이에 이영쇠는 오전 11시경 차병혁(車炳赫)・윤영선(尹永善) 등과 함께 어은리(漁隱里) 장안면사무소에서 약 200명의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면사무소 건물과 시설물, 서류, 비품 등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이어서 면장 김현묵(金賢黙)을 앞세우고 쌍봉산에 올라 군중들과 만세를 불렀다. 이후 우정면 사익리(沙益里)의 면사무소로 가자는 주장이 나오자 산에서 내려왔다. 이영쇠는 차희식・장소진 등과 함께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이때 차인범(車仁範)・이순모(李順模) 등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불태웠다. 오후 5시경 이영쇠는 차병한 등과 함께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여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장제덕・장소진・김흥식(金興植) 등은 약 2~3,000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파괴했다. 이때 이영쇠는 건물 뒤편에서 성냥으로 불을 놓아 주재소를 불태웠다. 주재소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권총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자, 이영쇠는 이들을 추적하여 처단했다. 이영쇠는 만세운동 주도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5일 구류되었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살인’, ‘방화’, ‘보안법(保安法) 위반’ 등의 예심종결결정에서 ‘관할위(管轄違) 결정’으로 판결되어 사건이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예심에서 관할 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으나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 불수리’를 결정하였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여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26일 칙령(勅令) 제10호에 의해 징역 11년 6월 9일로 변경되고, 1927년 칙령 제11호 대사령(大赦令)・형법 제52조에 의해 1927년 2월 24일 징역 11년 3월 9일로 변경되었다. 1929년 4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20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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