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容馥
(1876)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용복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9년 12월 충북 문의군(文義郡), 충남 회덕군(懷德郡)에서 군수품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된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활동은 전 민족적인 무력항쟁이었다. 그러나 1909년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대대적인 의병 탄압으로 전체적인 의병 활동은 점점 약화되고 있었고 소규모의 의병 부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충북 보은군(報恩郡)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의병에 투신하였다. 강원도 원주(原州) 출신의 원형규(元亨圭)와 함께 1909년 12월 3일 충남 회덕군 일도면(一道面) 황호동(黃湖洞) 동장(洞長)의 집에 들어가 "우리는 의병이다. 군용금(軍用金) 50원, 초혜(草鞋) 50족, 백목면(白木綿) 5필을 제공하라"며 군수품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전북 무주군(茂州郡) 지천동(之天洞)에 사는 송명옥(宋明玉)과 함께 충북 문의군과 충남 회덕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1월 4일 공주지방재판소(公州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았다. 1910년 1월 8일 공소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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