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業
(1859)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용업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이강년(李康秊) 의진의 포군(砲軍)으로 충북 충주(忠州)·제천(堤川)·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용업은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자 이강년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문경에서 안동부 관찰사를 처단하면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던 이강년 의병장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그리하여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이같은 이강년부대에 포군으로 가담한 그는 1907년 초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충북 영춘·제천·충주·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토벌대는 물론, 친일 행위를 일삼고 있던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활발한 의병투쟁을 벌이고 있던 중 그는 단양군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와 남면(南面) 괴평리(槐坪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하다가 불행히도 붙잡혔다. 그리하여 1909년 10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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