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雲
1911-12-26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용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군(光州郡)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구속학생 석방’과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 ‘독립만세’ 등을 외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의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조시위를 계획하였다. 1930년 1월 24일 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용운은 전달준(全達俊)·이홍우(李鴻雨) 등의 학우들과 모임을 갖고 만세시위운동을 결의하였다. 이용운은 자신의 하숙집을 시위 준비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들은 목판을 조각하여 찍어낸 백지에 괘를 그려 이튿날까지 태극기 7백여 매를 제작했다. 이어서 ‘노예교육 타파’ 등을 크게 쓴 선도기(先導旗) 8개를 제작하여 태극기와 함께 학교 교내에 감추어 두었다. 시위 예정일인 1월 25일 학급의 학우들에게 방과 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임을 알리고 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내 방과 후인 12시 40분경 이용운은 25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성 서문 밖에 집결하였다. 2학년생 약 40명이 선발대로 경성공립농업학교(鏡城公立農業學校)로 몰려가 강당 안에 태극기를 던져 넣었다. 선도대와 다시 합류한 학생들은 큰 기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남문 밖 신남문을 거쳐 경성공립농업학교로 행진하였다. 동교 교정에 이르자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이후 시위대가 서문을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0년 3월 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4일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1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21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