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柱
1894-12-27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喆, 李元植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원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1년 중국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원,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7중대 분대장(分隊長)으로 활동하고, 1926년 정의부(正義府)와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등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5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서로군정서에 입대하여 9월경까지 활동했다. 1922년 9월 환인현(桓仁縣)에 근거를 둔 대한통의부 제7중대 일등졸로 입대하여 분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26년 6월 대한통의부가 정의부로 통합될 때 정의부에 편입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길림(吉林)에서 고할신(高轄信)의 권유로 고려혁명당에 입당하였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길림성에서 정의부의 항일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결성된 조직이었다. 정이형(鄭伊衡)을 비롯하여 국내에 김봉국(金鳳國)ㆍ이동락(李東洛)ㆍ이동구(李東求)ㆍ송헌(宋憲), 러시아에 있던 이규풍(李奎豊)ㆍ주진수(朱鎭壽)ㆍ최소수(崔素水)ㆍ양기탁(梁起鐸)ㆍ현정경(玄正卿)ㆍ고활신ㆍ곽종대(郭鍾大)ㆍ오동진(吳東振)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1926년 10월 26일경에는 부하 박병선(朴炳善)과 함께 봉천성 관원부속지(關員附屬地) 해룡가(海龍街), 12월 27일에는 관원부속지 장수가(長壽街), 29일에는 관원동문(關員東門)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7년 국내 천도교(天道敎) 및 형평사와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었다. 1928년 4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2월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로 출옥하여 북경(北京)ㆍ천진(天津) 등지에서 활동하다 1935년 6월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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