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裕弼
1885-11-28 ~ 1945-11-2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祐弼, 春山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유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양기탁(梁起鐸)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일제가 날조한 소위 사내(寺內) 총독암살음모사건(일명:105人事件)에 관련되어 의주헌병대에 체포되어 전남 진도(珍島)에 1년간 유배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에서도 학생, 시민들이 모두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들어갔으나, 일경의 탄압이 극심하였는데, 이때 그는 고일청(高一淸)·조봉길(曺奉吉) 등 한인관리(韓人官吏)들과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그는 4월 13일 상해에 도착하여 교민단(僑民團), 의사원(議事員), 임시정부 조사원, 내무부 비서국장 등의 책임을 맡았으며, 동년 8월에는 안창호(安昌浩)·김석황(金錫璜) 등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0년에는 안창호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동년 8월에는 미국의원 동양시찰단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자 그 준비위원에 임명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1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1922년 5월에는 동 부의장에 선출되어 1926년 2월까지 의정활동을 하였고, 1924년 12월 16일부터 1925년 2월 13일까지 내무총장, 1925년 7월에는 재무차장, 동년 10월에는 국무원으로서 1926년 8월 재무장을 겸임하였으며, 1933년까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21년 4월에는 한·중 양국이 상부상조하고 대일항쟁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 동지인 신익희(申翼熙) 및 중국인 주검추(周劍秋)·오산(吳山)·심중준(沈仲俊) 등과 함께 한 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설립하였으며, 1922년 9월에 동사재무과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3개주의(三皆主義)를 제창하여 민족개로(民族皆勞), 민족개병(民族皆兵), 민족개합(民族皆合)의 목표 아래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최석순(崔錫淳)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10만 노병의 양성과 1억이상의 전비(戰費) 조성을 목적으로 활약하였으며, 동회 이사 겸 경리부장에 임명되었다가 1926년 4월에는 동회 이사장에 선출되어 1929년 2월까지 역임하였다. 1923년 8월에는 상해 교민단장(僑民團長)에 선출되어 민단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교사(敎舍), 교칙(校則) 등을 쇄신 보완하고, 1923년 12월에는 국정교과서 편집위원으로 종사하는 등 1927년까지 동교 교장으로 후진양성을 위한 육영(育英)에 전념하였다. 한편 그는 1933년 3월까지 교민단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사업으로 민성(民聲), 상해춘추(上海春秋), 상해신문(上海新聞)을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였으며,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와 상해지남(上海指南)을 편찬 발간하는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통의부(統義府)에 내분이 일어나 의군부(義軍府)가 병립되고 동족간에 분열상이 노출되자, 통의부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등은 임시정부에 원조를 청하여 임정 직속의 통일군정부를 수립하여 항일투쟁에만 전념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김승학(金承學)과 그를 만주로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1924년 8월 이웅해(李雄海)·윤세용(尹世茸)·양기하(梁基瑕)·심용준(沈龍俊) 등과 통화현(通化縣)에서 임정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고 영농(營農)과 훈련을 병행하는 군정부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선상에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이 범람하는 등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으며, 이에 1930년 3월에 상해, 남경, 북경, 광주(廣州) 등지의 독립운동자를 규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총무이사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각지에 지부(支部)를 설치하고 상해소년동맹, 상해청년동맹, 상해애국부인회, 재만 농민호조사,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병인의용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기관지로 한보(韓報)·한성(韓聲) 등을 발간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인 상해신문(上海新聞) 사장에 취임하여 차이석(車利錫)·이수봉(李秀峰)·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언론을 통한 항일여론을 유도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로 일제의 독립운동자에 대한 발악적인 보복이 잦아지자, 임시정부는 항주(杭州)로 이전하고 요인들이 남경과 가흥 등지로 흩어지게 되자 독립운동 단체의 행동통일과 대동단결을 하자는 요청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32년 10월에 그는 김규식(金奎植)과 같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 준비위원회가 발전하여 뒤에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을 규합한 통일동맹을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1933년 3월 9일 상해 품반로(品班路)에서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15일 그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6년 3월 23일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평북 임시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어 반공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월남하던 도중 1945년 11월 29일 38선상인 청단(靑丹)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이때 마침 동년 11월 23일 환국한 임시정부에서는 김선양(金善亮)·윤하영(尹河英)을 조문사절로 파견한 바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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