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允先
(1862) ~ 1909-05-20·조선
이명·자·호 李雄來, 李白來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윤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육군참위학교(陸軍參尉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7년 음(陰) 3월 9일, 양회일(梁會一)·안찬재(安贊在)·임낙균(林洛均) 등과 함께 국세를 논의하다가 양회일이 "현금의 나라 사정이 판탕(板蕩)하여 국민된 자로서 망하길 기다릴 수 만은 없다. 그런 까닭에 거의하고자 하니 그대 또한 동참하시오"라고 하자, 이를 쾌락(快諾)하여 함께 거의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능주에서 창기하여 동복(同福) 지역으로 진출하며 활동을 본격화하던 중 붙잡혀 유형(流刑) 10년을 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방면(放免)되었다. 이에 다시 재기를 도모하고, 전남 능주를 본소(本所)로 하여 잠적했던 의사와 사졸들을 규합, 대오(隊伍)를 정비하고 군사훈련으로 군기(軍紀)를 다진 뒤 1908년 1월 21일 발대, 진군하였다. 그 후 장흥(長興)경찰서를 습격하여 소총 7정과 탄알 700발을 거두고 일본군 7명을 참수하였다. 이어서 심남일(沈南一)·임창모(林昌模) 등과 함께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결성하고 도대장(都大將)에 추대되어 호남(湖南) 지역을 여섯 경계〔六路〕로 분할하여 군기(軍機)와 자금(資金)을 나누고, 보성(寶城)의 안계홍(安桂洪) 의진과 연합하여 장흥(長興)·강진(康津)·흥양(興陽)·보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또한 복내(福內) 헌병분파소(憲兵分派所)를 습격, 일본군 3명을 죽이고 건물을 전소시켰다. 그러나 광주(光州)로 향하여 진군 중, 광주·동복 분계를 이루는 산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선발 육장(六將)인 대장(大將) 양회일, 중군장(中軍將) 임창모(林昌模), 소모장(召募將) 안찬재(安贊在), 좌익장(左翼將) 유태경(柳泰京), 우익장(右翼將) 신태환(申泰煥) 등과 더불어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군에 굽히지 않다가 끝내 적탄에 맞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3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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