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赤曉
1902-06-01 ~ 미상·현대
이명·자·호 李金童, 李今童, 李應鍾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적효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희생되었다. 이적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인쇄소 견습공이 되었다. 신문사 인쇄직공으로 근무하던 중 1922년 문예단체 염군사(焰群社)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5년 경성출판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 서울에서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 파업 당시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다시 들고 일어난 인쇄소 직공들의 투쟁은 직공들의 승리로 끝난 바 있었다. 당시 교섭위원을 맡은 이적효는 직공들의 권익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 외에도 출판·인쇄 노동계에서 활동하는 한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및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 등에서 활동하며 청년의 ‘사회적 교육과 정치적 훈련’에 힘썼다. 1926년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이적효는 1930년 12월 조선공산당재건공작회(朝鮮共産黨再建工作會)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에 앞장섰다. 이 외에도 1931년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左翼勞動組合全國評議會) 조직 준비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노동환경의 개선과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위한 사회주의 선전 등에 힘쓰던 이적효는 일경에 붙잡혀 1934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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