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林
(1900) ~ 1977-05-12·현대
이명·자·호 李宗林, 李昌林, 李鍾林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종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경남도 원산(元山) 출신인 이종림은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후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이주했다. 연해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이중집(李仲執)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그는 1920년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했다. 1924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총국대회에 참석하여 고려공청 만주비서부를 설립하고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러시아에서 한인 사회주의 단체의 통일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던 중 1925년 1월 러시아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종파행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명당했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에서 제2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함경남도 간부로 선임되었다. 한편 신간회(新幹會) 원산지회에서 활동하며 ‘재만동포 문제’ 실행위원으로 있으면서 만주 및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었다. 1928년 일제가 소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사회주의 세력을 크게 탄압하자, 이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였다. 1929년 5월에는 중국 길림(吉林)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1931년 서울에서 학생독서회를 조직하여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공재건설동맹을 조직하여 조직선전부를 맡으며 동지 규합과 선전 등을 하였다. 1937년 일제에 의해 소위 r·s사건[讀書會事件]의 지도자로 지명된 이종림은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국외로 피신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7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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