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萬
1892-09-12 ~ 1960-11-06·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종만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통분히 여긴 그는 스승 김제환(金濟煥)과 함께 불납세(不納稅)·불입적(不入籍)·불응역(不應役) 운동을 펴다가 1913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어 그는 김제환·김선홍(金善弘)·신태영(申泰永) 등과 함께 청원군에서 성산대강회(聖山大講會)를 열고 일제에 항거하여 거의(擧義)할 것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후 계속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1920년 2월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문 탁(文鐸)·박무병(朴武柄)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노동자의 상부상조와 인격적 및 지적 향상을 목적한 계몽적 노동단체였다. 동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기존 노동단체의 규합에 힘써 한때 회원이 8천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1920년 5월 김영만(金榮萬)·홍갑표(洪甲杓)·박무병 등 89인과 함께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으로서 물산장려·상부상조·인권평등에 의한 세계평화의 확립을 취지로 하는 조선민단(朝鮮民團)을 조직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조선민단은 동년 7월 경성중앙기독교 회관에서 '때가 왔다' '죽엄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하여 천 수백여명의 청중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동단은 7월 31일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였다. 그는 1920년 음력 8월경 신흥구(申興求)·신형식(申亨植)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펴기로 결의하고 유영창(柳永昌)·한병호(韓秉浩) 등을 동지로 포섭하여 비밀결사 평양결사단(平壤決死團) 청주지부(淸州支部)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모의권총을 소지하고 충청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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