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俊植
1900-02-18 ~ 1966-04-0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雄, 李辰卓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준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에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강무당(講武堂)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으로 항일무력투쟁에 용맹을 떨쳤으며, 1927년 4월에는 길림성 신안둔(吉林省 新安屯)에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에 정의부 군사위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이듬해 봄에는 국민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으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여 그 중앙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 10월 상해로 옮겨가 중국군에 복무하였으며, 1934년 6월에는 김 철(金徹), 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7년에 임시정부가 광주(廣州)로 이전하게 되자 그는 중국군 고급장교로서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데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군에서 자진 예편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중국령 대표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과 임정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940년 6월에는 임정 군무부 군사특파단 주임으로 산서(山西)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1940년 9월 마침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동년 11월에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이듬해 3월에 산서성(山西省)으로 출발하여 노태준·안춘생·노복선·조인제·이석화 등 1지대 간부들과 함께 태원(太原), 대동(大同), 석가장(石家莊)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1941년 2월에는 광복군 제1징모분처 주임위원으로 겸직 임명되어 적극적인 초모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비서장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중령구(中領區)의원 선거 회장도 맡았다. 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전입되었고 동년 5월 중경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총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광복군 총사령부에 복무하면서 임시의정원의 의정활동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2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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