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達
1876-02-12 ~ 1936-07-1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중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낙평동(洛坪洞) 교회 목사인 강우근이 서울의 만세소식을 기독교측의 인사들에게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영해의 만세운동계획은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은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柄谷面)·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중달은 이같은 거사 계획을 접하고 적극 참가하였으며, 3월 18일 2천 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일경들을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따라 부를 것을 주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후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주재소 등 일제 행정기관의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였는데, 특히 주재소에서는 총기를 빼앗아 파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한 영덕경찰서 일경들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경, 시위군중은 대구(大邱) 보병 80연대 병력 17명의 지원을 받은 일경과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공문서 훼기·보안법 등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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