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賢相
1924-05-14 ~ 1968-03-23·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현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하였던 백강(白岡) 이승호(李承浩)의 장남으로서 평소에도 항일독립정신이 투철하였는데, 경복중학교 재학중, 1939년에 동교생 장의찬(張宜燦)·주낙원(朱樂元)·명의택(明義宅) 등과 함께 동지가 되어 조국광복을 위하여 친일파 및 일본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포섭 등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뜻이 맞는 급우들을 규합했고, 또한 중앙중학교에 재학중이던 남상갑(南相甲),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던 김성근(金盛槿)·이경춘(李慶春) 등을 동지로 맞았다. 그후 목적완수를 위해 계획을 진행하다가, 1941년에 동지들이 각각 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이들은 동년 가을에 당시 봉래동(현재 만리동) 소재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학생결사인 흑백당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강령·규약 등을 정하였다. 이때 그는 당대표로 선임되었다. 당의 기본강령으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비밀, 책임완수 등을 정하였다. 그리고 실천 행동방략으로써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는 한편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있는 당시 욱정(旭町)(현재 남산동 부근)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일제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가까왔음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뿐아니라 흑백당은 거사에 필요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홍건표(洪建杓)와 함께 특공대로 뽑혀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내었다. 그런데 이렇게 거사를 준비하는 도중 1943년 10월에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학생 김창흠(金昌欽)이 귀향도중 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이때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됨으로써 흑백당의 조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국내활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당원들은 김성근(金盛根)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그도 주낙원과 한 조를 이루어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그를 비롯한 선발대원은 1944년 1월경 만주의 북경·심양(瀋陽)·신민(新民)·승덕(承德) 등지에서 전원이 붙잡혀 국내로 이송되었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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