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炯模
1913-12-19 ~ 1941-03-3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成均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형모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그는 1931년 12월 김감년(金甘年)·박군암(朴群岩) 등의 동지와 함께 모임을 갖고 항일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해 협의하였으며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던 중 1933년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海南)에서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 지역에서 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그들은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이후 동회는 완도·해남·강진·장흥(長興)·영암(靈岩) 등의 지방에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조직확대와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에 힘썼으며, 장흥·해남·완도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漁業組合) 폐지운동, 강제연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34년 2월 중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그는 일경으로부터 받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얻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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