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化伯
1885-05-23 ~ 1941-01-1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奉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화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장수(長水)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전북 장수군 산서면(山西面) 동화리(桐花里) 시장에서 박정주(朴政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항일시위를 전개하였다. 장수에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것은 서울에서 3·1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다음날인 3월 2일 장수읍 천도교 교구실에 선언서가 1백여 매 전달되면서였다. 장수 지역의 천도교 인사들은 선언서를 각 면의 게시판에 붙이면서 만세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박영춘(朴永春) 등 천도교 인사들이 붙잡혔고, 이러한 상황에서 읍내의 만세시위가 어려워지자, 만세시위는 산서면에서 시작되었다. 산서면의 만세시위는 산서면과 이웃한 고을인 임실군 지사면(只沙面)의 유생 박정주와 안성섭(安成燮)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이화백은 이들의 계획에 동참하면서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그리하여 이화백 등은 동화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거사 당일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준비한 다음 3월 19일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만세시위 중 무력을 앞세운 일경에 의해 박정주 등 주동 인물이 붙잡혔다. 이화백은 안성섭 등과 함께 박정주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5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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