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會植
1891-01-24 ~ 1988-07-20·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회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24년 경북 안동에서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에 참여하여 소작쟁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의 간부인 김남수(金南洙), 이준태(李準泰) 등에 의해 1923년 11월 경북 안동군 풍산면(豊山面)에서 결성된 풍산소작인회는 소작인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자작농과 지주까지 포함된 농민운동 조직이었다. 소작인회에서는 고율의 소작료, 과중한 세금, 부당한 부역, 소작권에 대한 지주의 횡포 등으로부터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소작 농민은 물론이고 머슴과 부인들이 소작회에 의연금을 기부할 정도로 전폭적인 참여와 지지를 얻어 설립 1년만에 회원이 5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회식은 이 지방의 지주였으나 소작 농민들이 고율의 소작료와 지주의 횡포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하여 풍산소작인회에 참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지주의 자의적인 소작권 이동 등의 횡포에 항거하여 소작인들의 권익옹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24년 4월 일본인 지주 소림병이랑(小林兵二郞)에 대한 소작쟁의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는 회원에게 양식을 부조하는가 하면 선전연극을 공연하는 등 농민계몽에 힘썼다. 그는 1924년 6월 안동군 풍서면(豊西面)의 지주 김창한이 자의적으로 소작계약을 파기하자 동료들과 함께 김창한의 논에서 경작을 방해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4년 10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25년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풍산학교의 전신인 풍산학술강연회를 설립하여 교사로서 민중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0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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