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寬浩
미상 ~ (1920)·조선
이명·자·호 임관치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임관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20년경 만주의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의해 피살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된 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적절한 시기가 오면 국내로 진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들은 압록강 대안지역인 서간도지역에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등 한인의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개교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이처럼 활발히 독립전쟁에 대비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서간도 지역에도 미치게 되어 독립운동이 보다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서간도지역에는 3·1운동 이후 30여 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내로 진공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그들의 말에 잘 순종하는 중국 현지 당국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31일에는 오래 전부터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 중심지였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습격하여 많은 한인들을 체포 투옥하였다. 이어 훈춘(琿春)사건을 빙자하여 만주로 출병한 일본군은 10월 하순경부터 관전(寬甸)·통화(通化) 등 서간도 지방 각지에서 독립군 수색을 빙자하여 방화·살인·약탈 행위를 도처에서 자행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고 있을 무렵 임관호는 한족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구이다. 이 단체에서는 재만 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시가에 본부인 중앙총부(中央總部)를 두고 그 최고 책임자로 이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무사장 김종훈(金宗勳), 사판(査判)사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상무(常務)사장 김정제(金定濟),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내무사장 곽문(郭文), 검사감 최명수(崔明洙) 등을 두어 재만동포의 치안·재무·사법·행정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한족회는 지방자치조직도 체계화하였다. 당시 한족회의 지방조직은 유하현·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임강현(臨江縣)·해룡현(海龍縣)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호수는 1만여 호에 달하였다. 이곳에 한족회는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호마다 백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 등의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족회의 지방자치는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만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한인자치기구에서 흥동지방(興東地方)의 서기로 활동하던 임관호는 1920년 4월부터 1921년 2월 사이에 이제의 한인독립운동가의 탄압에 의해 서간도 지역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