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德宰
1912-07-23 ~ (1944-0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吳均, 黃永周, 吳鈞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임덕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임덕재는 1933년 4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의열단(義烈團) 계열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를 제2기로 입학했다. 입학 당시 친구에게 '자신의 신상에 변함이 없는 한 고향에 일체의 연락을 안 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명하였다. 1934년 4월 동교를 졸업했는데, 그 직전인 2월 낙양(洛陽)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그해 9월 김원봉(金元鳳)에게 선발되어 항주(杭州) 소재 남의사(藍衣社) 간부훈련소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35년 4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에 거주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남경구(南京區) 당원으로 선전공작에 주력하였다. 또한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제3기 교관이 되어, 진중요무령(陣中要務令) 및 실과교련(實科敎鍊) 과목을 담당하여 후배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데 노력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남경구당부 선전책임자가 되었고, 1939~1942년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소속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일원으로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조선의용군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5년 동안 중국 팔로군과 함께 3차례에 걸쳐 대규모 일본군 반소탕(反掃蕩)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많은 조선의용군이 전사하였는데, 임덕재 역시 태항산(太行山)에서 항일전투를 벌이다가 1944년 8월 이전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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