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得淵
1896-04-24 ~ 1953-10-27·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林德鍊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임득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춘섭(林春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그는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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