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錫鉉
1896-08-26 ~ 1971-10-1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林錫洪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임석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안동에서는 1919년 3월 13일 안동 읍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3월 17일 예안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20일까지 동후면(洞後面)·임동면(臨東面)·도산면(陶山面)·안동 읍내 등에서 독립만세를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겼다. 3월 21일 길안면(吉安面)·일직면(一直面)·임동면·임하면에서 각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임하면에서는 임찬일(林燦逸)이 금소동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심하고 노말수(盧末守) 등과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권유했다. 오후 8시경 조복선(趙卜先)의 집 부근에 약 300명의 주민이 모였다. 임석현(林錫鉉)은 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박유석(朴有石)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도로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군중들은 금소동에서 면소재지 신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9시경 임득연(林得淵), 임우민(林又民) 등이 신덕동에 도착해 오후 12시경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고 임찬일, 노말수 등의 지휘하에 주재소를 공격하려 했다. 한편 오후 6시경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平洞) 편항(鞭巷) 시장에서 유연성(柳淵成), 유동수(柳東洙) 등의 주도로 약 5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편항경찰관주재소를 공격했다. 이에 순사 권하연(權河淵)이 해산을 강요했지만 임석현이 유북실(柳北實)·손돌이(孫乭伊)·임범섭(林範燮) 등과 함께 군중 90명을 이끌고 주재소로 진출했다. 해산을 강요하던 순사들은 군중들의 위세에 압도되어 사무실 뒷산으로 도망갔다. 임찬일·노말수 등이 사무실로 들어가고 임돌이(林乭伊)·임춘섭(林春燮)·금중연(琴重淵) 등도 뒤따라 들어가 시설물을 파괴하고 벽을 부수며 소나무를 뽑아냈다. 이어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이동했다. 당직자인 면서기는 산으로 도망쳤고 면사무소 건물은 지붕과 기둥만을 남기고 대부분 부서졌다. 호적을 비롯한 다수의 공문서들도 폐기되었다. 이에 보병 제80연대 소속 일본군이 출동해 순사들과 함께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3명이 순국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시위 주도자 등 28명이 체포됐다. 이처럼 임석현은 임하면 3.1운동을 주도하여 신덕경찰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안동경찰서로 압송되어 신문조사를 받은 후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3일 이른바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의성지청의 예심에 회부되었다.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闕席) 재판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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