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昌模
미상 ~ 1909-10-13·조선
이명·자·호 林洛均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임창모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노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민족적 대응으로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임창모는 능주(綾州) 출신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능주(綾州)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치려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和順)·동복(同福)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 둔병하던 중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양회일이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고 외치면서 나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잡혔다. 임창모 역시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하여 결국 체포되었다. 그후 양회일은 광주 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고 임창모는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해배(解配)되어 귀가하였다. 이즈음 전라남도 보성(寶城) 일대에서 안규홍(安圭洪, 桂洪, 進士, 담살이)의 의진이 가장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임창모는 해배되자 마자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안규홍의 보성의진은 파청대첩(巴靑大捷)·진산대첩(眞山大捷)·원봉산(圓峰山) 전투 등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승리를 구가하였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 의진과 분진(分陣)하여 보성(寶城)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09년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黑石山)에서 일군과 접전하던 중 10월 13일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