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敬順
1900-04-13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경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6년 4월 무렵 중국 난징(南京)으로 넘어가 금릉대학(金陵大學) 중학부에서 1920년 4월까지 수학하였다. 학업을 이어나가던 1919년 11월 김성일(金誠一)·장송재(張松裁) 등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사위원에 임명되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에서 지방 부호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21년 1월 중국 봉천성 안동현으로 넘어가 독립신문사 기술원(記述員)으로 일하며, 독립신문 배포기관소 설치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무국(警務局) 밀정에게 탐지되어 1921년 1월 17일 봉천성 안동현 구시가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을 이유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즉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김천(金泉)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3년 8월 14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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