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文景
1883-03-21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문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장문경은 1919년 평북 의주군(義州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주군의 3.1만세운동은 민족대표 중 한 분인 목사 유여대(劉如大)가 직접 지도했다. 유여대는 2월 17일경에 정명채(鄭明采), 김두칠(金斗七) 등에게 장차 거족적인 독립 운동이 일어날 것이니, 이곳 의주에서도 거기에 대비하여 거사 준비를 하자고 하였다. 정명채, 김두칠은 곧 선언서 등사작업에 착수했고, 유 목사는 안석응(安碩應), 이원익(李元益), 김창수(金昌洙) 등에게 지시하여 1일 아침 선언서를 시내 각 관공서에 배포하라고 일러두었다. 3월 1일 하오 2시 의주서부교회 광장에는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지도부가 임시로 마련한 단상에 올라서서 개회를 선언하고, 찬송·기도의 순서로 진행 중 경성서 보내 온 독립선언서 백 장을 의주읍 서부동 거주 강용상(康龍祥)이 받아 가지고 왔다. 유여대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황대벽(黃大闢)이 독립 촉구 연설을 한 후, 일동이 독립만세 3창을 하고, 군중은 독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다음날 3월 2일에는 남대문 밖 광장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 날의 형세는 전날보다 더욱 성대하였고, 천도교측 최동오(崔東旿), 최안국(崔安國) 등이 독립운동 취지를 연설하였다. 이날 헌병대의 출동으로 약 30명의 시위자가 붙잡혔다. 3일에는 고종 국장일을 맞아 읍내에서 1,200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4일, 6일, 27일, 4월 1일에도 대대적인 시위운동이 연이어 벌어졌다. 시위 후 체포된 장문경은 1919년 6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2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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