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汶同
(188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문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 음력 9월과 12월 전남 장성군(長城郡)과 전북 순창군(淳昌郡)에서 김영엽의진(金永燁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등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영엽 의병장은 기삼연(奇參衍)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의진 간의 연합항쟁을 중시하였다. 김공삼(金公三)ㆍ박도경(朴道京)ㆍ신창학(申昌學)ㆍ심남일(沈南一)ㆍ전해산의진(全海山義陣)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1908년 음력 9월 5일 김영엽의진의 의병 약 15명과 함께 전남 장성군 석운면(石雲面) 무릉동(武陵洞) 동장(洞長)의 집에 들어가 엽전 10냥과 짚신 20켤레를 모집하였다. 같은 해 음력 12월 25일에는 의병 5명과 함께 전북 순창군 복흥면(福興面) 은동(銀洞)의 민가에 들어가 엽전 5냥, 짚신 20켤레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 2월경 김영엽 의병장의 사망으로 의진이 해산되자 귀가한 후, 9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으로 전라도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던 시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0월 6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2년 9월 23일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에 의하여 1913년 1월 21일 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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