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尙欽
1895-12-20 ~ 1920-05-2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상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평복동(平福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칠곡에서는 인동면(仁同面)과 약목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인동에서는 3월 12일과 3월 14일의 두차례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인동면 산기슭에 3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이상백·이영식이 교대로 연설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의 시위는 출동한 일경에 의해 곧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동의 만세시위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김도길은 동교생인 박풍술(朴風述)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거사일을 3월 14일로 정하였다.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한 이들은 3월 14일 오후 9시 마을 뒷산 기슭에서 2백 여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인근 지역의 만세시위에 자극받은 약목면 평복동 거주 지하수(池夏洙)는 자신의 마을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년 4월 9일 저녁 동리 청년들을 규합하였다. 지하수는 이들에게 만세시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의거를 단행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즉석에서 장상흠을 비롯한 12명의 청년들이 의거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동일 밤 마을 앞 동산에 올라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 연호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태(笞) 90도를 받고 장독으로 1년만에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0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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