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世湧
1902-04-17 ~ (1936)·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張相徵, 張元濟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세용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22년 10월 환인현(桓仁縣)에서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의용군 제4중대 제1소대장에 임명되어 중대장 홍기주(洪基柱) 및 김국보(金國輔)·신홍영(申洪永) 등과 함께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서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이후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1930년 8월에는 혁명군 제5대장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 3월에는 남만의 독립운동단체가 통일 흡수된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혁명거두들이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同)의 국민부 사무실에 모여 민족유일당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23명의 중앙위원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조선혁명당은 국민부군을 당군(黨軍)으로 개편하여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고 대일전(對日戰)에 나서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군의 간교한 계획으로 9.18사건이 일어나 동삼성(東三省)이 적에게 장악되자 조선혁명군도 직접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1931년 12월 신빈(新賓)에서 긴급중대회의를 하던 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조선혁명당의 중앙부서가 개편되니 그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총사령관 김관웅(金寬雄)을 보필하게 되었다. 또한 1931년 4월에는 동 상무집행위원에 보선되는 동시에 노동부(勞動部)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8월에는 다시 조직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31년 12월 19일 신빈현 하북(新賓縣河北)의 교민 가옥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있던 중 일경 대부대의 습격을 받고 그를 비롯한 조선혁명당의 중요간부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그는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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