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志樂
1905-03-10 ~ (193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山, 劉淸華, 李鐵岩, 韓國劉, 劉漢平, 劉錦漢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지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산(金山)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 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고학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만주(滿洲) 삼원보(三源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다녔다. 1920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獨立新聞)』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기도 했다. 1921년 베이징[北京]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던 중, 북경지역에서 크게 풍미하던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면서 사상적 전환을 가져 왔다. 1923년 김성숙(金星淑)등과 함께 공산청년동맹(共産靑年同盟)에가입하고, 잡지『혁명(革命)』을 간행하는 한편 1924년 고려공산당 북경지부 설립에 참가했다. 1925년 중국 대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혁명의 본거지 광둥[廣東]으로 간 그는 1926년 김성숙 등과 조선혁명청년동맹(朝鮮革命靑年同盟)을 조직하여 중앙위원을 맡고, 기관지 『혁명운동(革命運動)』의 편집을 담당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광둥[廣東]에 머무는 동안 의열단(義烈團)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고, ‘중국인의 후원 하에 조선 독립을 실현시킨다’는 목적하에 조직된 유월혁명동지회(留越革命同志會)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在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 광둥[廣東]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져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울 때 공산당의 광동꼬뮨에 참가하였다. 1929년 봄 베이징[北京]으로 넘어가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고,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에 가입하여 민족대당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만주 지린[吉林]에서 열린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해체 후 조선공산당 당원의 중국공산당 가입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북경에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30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몇 달 만에 석방되었다. 1931년 베이징[北京]으로 탈출했으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의심을 받아 당적을 복구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2년 보정(保定) 제2사범학교와 고양(高陽)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농민 대중의 의식계몽에 힘을 쏟았다. 1933년 베이징[北京]에서 다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34년 석방되었다. 1936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김성숙·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결성하였으며, 1937년 동 동맹의 중국 섬감령(陝甘寧) 소비에트지구 주재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 연안으로 가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일본경제·물리학 등을 가르쳤으나, 중국공산당의 의심을 받아 1938년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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