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寒星
1895-03-03 ~ 1931-03-11·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張志浩, 張漢成, 張志鎬, 張智浩, 張漢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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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장한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진남포(鎭南浦) 사람이다. 군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건너가 1916년 연길현 상관도구의 영생학교(永生學校)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 연락 차 입국하다가 신의주(新義州)에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3년에는 상해 국민대표회에 고려혁명군 사령부 대표로서 참가하여, 동년 2월 5일에는 제4차 회의에서 문시환(文時煥)·강 일(姜逸) 등 7인의 노동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또한 그는 건설파(建設派)의 부속대표(附屬代表)로 참여하여 독립운동 선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1929년 9월 27일에는 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 등이 중심이 되어 남만지역에서 조직한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제1회 중앙의회 선거에서 외무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소위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를 비롯한 국민부 행동대원 20여명이 입국하였다는 정보를 들은 일경은 전국에 비상경계를 펴고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으며, 그는 주요 수배인물로 계속 추적을 당하였다.한편 그는 동만지방 독립군 행동대장으로서 북간도 일대의 지방조직 및 군자금 모집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연길현 숭례향 옹성랍자(崇禮鄕甕聲 子)에서 독립군체포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일본경찰 순사보 평정삼대치(坪井三代治)를 사살하였다.1930년 2월 19일 일제의 강력한 항의로 중국 치안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귀화증명서를 소지한 것을 구실로 일본경찰에 인도되지 않았으나 중국 길림(吉林)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에 옥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77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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