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福奎
(187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전복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연천(漣川) 사람이다. 김수민(金秀敏) 의진의 좌익장으로 경기 북부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김수민은 경기도 장단(長湍) 사람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여 반외세(反外勢)·반봉건(反封建)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농민수탈이 나날이 강화되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라 일제에 의해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8월 살고 있던 경기도 장단군 복면 솔랑리(率浪里)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무장을 준비하여 갔다. 우선 그는 군부(軍部) 소관의 대포를 빼앗아 무장하고, 장단군 북면 덕음동(德蔭洞)을 거점으로 군량미를 마련하고, 보부상 모집하여 정보대로 삼아 적정을 탐색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김수민 의병장이 의진을 조직할 때 전복규는 여기에 참여하여 좌익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김수민 의병장과 함께 1907년 10월 11일 경기도 장단군 북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같은 해 11월 27일 개성의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다. 1908년에 들어와 소부대 유격전술로 투쟁방식을 전환한 김수민 의진에서 그는 김수민 의병장의 지휘 아래 2월 경기도 마전(麻田)의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4월 16일에도 장단군 구화장(九化場)의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적들을 사살하고 다량의 병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달 연천군 북면에서, 9월에는 마전군 북면에서, 10월에는 마전군 동면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면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2월 6일 경성재판소에서 유형(流刑) 15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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