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一
1893-12-25 ~ 1938-05-11·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全仁學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전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기독교계통의 유력한 독립운동가로서 만주와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일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로 이주하였으며,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5년 5월까지 간도지방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같은 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도항(渡航)하여 1918년 4월 한인사회당 창립에 동참하였다. 1919년 4월 이동휘를 도와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으며, 8월에는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 서기로 취임하여 격렬한 항일기사를 게재하였다. 11월에는 남북 만주 각지와 연해주지역에 항일 비밀결사 소년단이 조직되자 니꼴스크 지부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전일은 1919년 12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서기를 지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초까지 러시아지역, 만주지역 및 국내로부터 파견된 8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니콜리스크-우스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확대 개편된 한인 자치 단체였다. 1920년 3월 전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항일사상과 사회주의를 일본군대 내에 선전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을 기도하다 다시 4년의 가형을 받기도 하였다. 1928년 전일은 중국국민당과 연락을 취한 일로 간도 일본영사관경찰에 의해 3년간 재류금지(在留禁止)를 당하였는데 이를 위반하여 다시 1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7월 신간회(新幹會)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7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