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傔童
미상 ~ (1907-10)·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겸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강원도 원주(原州)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우리의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그 이듬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을미의병을 일으켜 문경에서 안동부 관찰사를 처단하였던 이강년 의병장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정겸동도 이 때 이강년 의병진에 가담하여 종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북으로 강원도 낭천(狼川 ; 화천)·인제(麟蹄)에서 남으로는 경상도 안동(安東)·영양(英陽)에 이르기까지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이강년 의병장은 대담한 유도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1907년 10월 이강년 의병장은 해뜰 무렵 1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유치(楡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때 정겸동도 참가하였다가 종사 주범순(朱範淳) 및 포군 1명과 함께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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