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東秀
1904-10-22 ~ 1991-10-05·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동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광주농고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방에서 장재성(張載性)·왕재일(王在一)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6명은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에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이기로 하고,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정남균(鄭南均)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그를 비롯한 농고생 유치오(兪致五)·유상걸(柳上杰)·주당석(朱唐錫)·문승수(文升洙) 등은 광주 누문리(樓門里)소재 김태호(金台鎬) 방에 모여 성진회의 목적을 계속 실행하기로 결행하였다. 1928년 3월에 동교 졸업 후에도 그는 독서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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