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夢龍
생몰년 미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몽룡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하와이에 이민을 와서 카우아이섬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했으며, 1908년 3월 카우아이섬에서 발간된 자신보(自新報)의 사우(社友)가 되었다. 1909년 6월 19일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카우아이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종군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이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창설한 한인비행가양성소에 들어가 비행술을 교육받았다. 1930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1년 11월 새크라멘토지방회 총무가 되었다. 1932년 1월 일제가 중국 상하이(上海)를 침략했을 때 일본군을 막아낸 중국 19로군을 위문하기 위해 위로금 50달러를 보냈다. 1933~1936년 새크라멘토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5년 대한인국민회 제26회 대표위원회 재정조사위원이 되었다. 1936년 5월 21일자 『신한민보』를 통해 미주한인사회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 1월 대한인국민회 전체대표대회 재정조사위원과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 새크라멘토지방회 대의원과 대한인국민회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3.1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39~1944년 새크라멘토지방회 대의원, 1941년 대한인국민회 전체대표대회 재정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1944년 새크라멘토지방회 집행위원장,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3월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하고 동지회에 입회하였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인구세, 의무금, 3.1적립금, 중국항일전쟁동정금, 광복군후원금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납부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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