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鳳俊
생몰년 미상
이명·자·호 鄭奉俊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봉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의병장으로 충청도·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주권을 크게 제약하였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정봉준은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1905년 을사륵약 직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8월 초 충주 노은면(老隱面)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같은 달 15일에는 괴사 칠성암(七星岩)에서, 그리고 지평 삼산동(三山洞)에서 일본군 300여 명과 3일간 교전하였다. 특히 충주군 목계(木溪)에서 일본군 10여 명과 교전하여 2인을 사살하고 말 5필 및 병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충주 과현(果峴)에서 그는 40∼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황해도 토산군(兎山郡) 황곡(黃谷)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의병진이 흩어지자 패잔병을 수습하여 원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정낙인(鄭樂寅)의 의진과 합진(合陣)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각도 의병진이 모여 13도 창의군을 형성할 때,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참여하여 관북창의대장이 되어 서울진공작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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