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岩右
1899-01-08 ~ (1950-09-3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대산암우(大山岩右), 촌정암우(村井岩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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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암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정암우는 1899년 1월 8일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양군(光陽郡) 골약면(骨若面) 성황리(城隍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5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노동에 종사했다. 오사카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상황을 봤다. 1930년 초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목건축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정암우는 1934년 3월 직업소개소 임시실업등록이 기한 만료로 무효가 되자 구직자들이 동요하는 것을 봤다. 이에 반대하는 선전삐라를 살포하여 그들을 조직화하려고 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의 친목단체인 박애회(博愛會) 간부 박수봉(朴洙鳳) 등을 토목건축노동조합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11월 일본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關西地方委員會)에 가입하여, 책임자가 되었다. 12월 말 김치용(金致鏞)을 보조 오르그로 삼고 그 재건에 노력했다. 관서지방위원회 평위신행(平韋信行)은 정암우와 함께 「관서지방협의회재건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935년 1월 「전협관서지방재건위원회(全協關西地方再建委員會) 당면임무」라는 문서를 배포하였다. 정암우는 1935년 3월 1일 검거되었다. 1936년 4월 18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정암우는 1938년 7월 오사카의 하대화천(下大和川) 철교(鐵橋) 밑에서 송정효(宋正孝) 등과 비밀회합을 갖고 한국인 의식분자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암우 등 5명이 다시 검거되었다. 1938년 12월 1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39년 12월 13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오사카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2년 6월 16일 형기가 만료되었다. 그러나 6월 26일 비전향이라는 이유로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예방구금에 회부되었다. 오사카 구치소에 가수용(假受容)되었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1950년 9월 30일 세상을 등져야만 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9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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