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宜鎔
1888-02-13 ~ 1956-04-0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宇原宜鎔, 尙見(字)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의용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고전면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의 박영묵(朴永黙)은 전국적으로 3.1만세시위가 발발하자 같은 마을의 정의용·이종의(李宗義)·정상정(鄭相正) 등과 더불어 인근 마을 동지 33인을 규합하여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동지 중 정재기(鄭在基)를 하동읍으로 파견하여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는 하동읍으로 가는 도중 경찰에 체포되어 만세를 부르면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진교리의 경찰주재소는 비상경계를 펴게 되었다. 그러나 정의용 등은 4월 6일 주교리 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4월 6일 이들은 장꾼을 가장하여 시장으로 잠입한 후 시장 요소요소에 매복하였다. 오후 1시 40분경 군중은 약 1,000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박영묵은 미리 만들어 놓은 단상에 큰 태극기를 잡고 올라가 간단하게 시위의 취지를 설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시장에 매복해 있던 33명이 태극기를 높이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뛰쳐나왔다. 시장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경찰과 한국인 경찰 박도준(朴道俊) 그리고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시위운동을 저지하려 하였다. 33명은 이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탈취하고 모자·제복까지 벗겨 버렸다. 또 군중들은 이들에게 주먹세례를 가하여 일본 헌병 2명과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때 급히 출동한 일본 수비대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정의용은 4월 6일 주교리 장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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