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在鎬
1863-12-18 ~ 1944-03-18·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재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사과(司果) 벼슬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6년 정월(음력)에 민종식·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瓚)·최상집(崔相集)·최선재(崔璇在)·이상구(李相龜)·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이만식(李晩植) 등과 더불어 대흥(大興) 광수(光水) 장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이튿날 바로 홍주(洪州)로 향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적들을 능히 대적치 못하겠으므로 할 수 없이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안병찬·박창로·윤자홍(尹滋洪)·최선재 등 수백 명이 적에게 체포되어 공주(公州)로 압송되었다가 윤 4월에야 풀려났다. 5월 11일(음력 4월 18일)에 다시 홍산 지치(鴻山 支峙)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이때 정재호는 황영수(黃英秀)·이세영과 함께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군사를 일으켜 바로 서천(舒川)으로 진격하여 적과 접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적의 양총(洋銃) 20자루를 노획하였다. 이때 군사의 수효는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남포(藍浦)에서 유준근(柳濬根)을 종군시키고 4일간 유진하면서 의병을 보강하였다. 의진은 남포를 떠나 보령(保寧)·결성(結城)을 지나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의 적을 물리치고 입성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의진이 이에 호응하였으므로 부서를 재편성하고 수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시 물러났던 적의 대공세가 끊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공방전에 힘이 진하여 5월 31일 새벽 3시 성문이 깨어지고 대장 민종식 등은 간신히 피신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80여명의 동지가 순국하였고, 79명이 체포당하였다. 결국 70명은 석방되었으나 유준근(柳濬根)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홍주에서 체포를 면한 민종식 등은 1906년 10월에 예산(禮山)에서, 그리고 겨울에는 부여(扶餘) 등지에서 재거를 꾀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모두 미거에 그치고 대거 체포선풍이 불었다. 그 동안 피신하고 있던 정재호는 1907년 2월에 체포되어 박윤식·곽한일(郭漢一) 등과 함께 수감되었는데 득병하여 위독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2월에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1907년 7월 2일 1등을 감하여 지도(智島)로 종신 정배되었다. 이때 곽한일·박윤식·황영수·김덕진·박두표와 함께 6인이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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