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鶴均
1903-05-20 ~ 1946-07-2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학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그는 일찍부터 일제의 한국병탄에 통분한 마음을 품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여 기회를 모색하고 있던 중, 1919년 전국 각지에서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이 거주하는 완도군 고금도(古今島)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월 이현열(李顯烈)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의기투합하여 만세시위의 일정을 협의하였다. 그후 정학균은 1월 22일이 광무황제(高宗)의 붕어(崩御) 1주기에 해당하므로 이때를 기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이현열에게 우송하였다. 이에 이현열은 자신의 집에서 홍철수(洪哲洙), 이수열(李守烈) 등과 모임을 갖고 오는 22일 고금도 보통학교에서 광무황제 1주년제식(週年祭式)이 있으므로 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일동은 모두 이에 찬동하여 즉석에서 만세시위의 취지를 담은 격문 7통을 작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성하는 김천영(金天寧)을 동지로 영입한 후 준비한 격문을 보통학교의 기숙사에 배부하였다. 한편 정학균은 동교의 기숙사에서 태극기 40본을 제작하고 거사 당일인 22일 아침 태극기 30본을 추가 제작한 후 광무황제 1주년제식이 끝난 11시경 고금면 농상리(農桑里) 행방산록(行方山麓)에서 태극기를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이어 자신은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우고 학생들을 지휘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2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0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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