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海昌
1885-03-15 ~ (1909)·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정해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북 제천(堤川)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충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정해창은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우리의 주권이 박탈되더니, 그 이듬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여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보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봉기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로 체결하더니 이어서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대중화단계에 돌입하였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을미의병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이강년 의병장이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이후 이강년 부대는 북으로 강원도 낭천(狼川 ; 화천)·인제(麟蹄)에서 남으로는 경상도 안동(安東)·영양(英陽)에 이르기까지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정해창은 이강년 의진의 참모로 참가하여 제천을 비롯한 충북 각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0월 이강년 의병진의 중군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올라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이강년 의병장이 청풍 까치재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적에게 붙잡혔다. 이에 이강년 의병장의 부장(副將)들은 저마다 의병을 거느리고 활약하였는데 영월 지방에서는 김상태, 삼척지방에서는 성익현, 영양·울진지방에서는 변학기가 오랫동안 활약하였다. 이 때 그도 다른 의병장과 마찬가지로 의병을 거느리고 독자적인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충북 제천·영춘, 강원도 영월 등지를 종횡무진하면서 대일항전을 하는 한편, 1909년 9월 충북과 강원도 지역에서 군수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병활동을 지속하다가, 1909년 4월 28일 가평(加平)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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