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基采
미상 ~ 1908-05-30·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기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갔다.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1907년 8월부터는 해산군인들이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망의 사태가 도래하자 그는 1907년 5, 6월 경 유병기(劉秉淇)·김준(金準:金泰元)·백낙구(白樂九) 등과 함께 거의하여 유병기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기포장(起砲將)에 선임되어 7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북 흥덕, 함평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500여 정의 총기로 무장하여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사방에 의세를 떨쳤다. 이들은 의병 거의 후 1년여 동안 전라도 일대를 무대로 일본군과 수십차례 전투를 벌이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전북 흥덕군 사진포(沙津浦)에서 일본인 가옥을 소각한데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함평읍내의 일본인 가옥들을 소각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다. 같은 해 12월에는 동복군 신평(新坪)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908년 2월 창평군 무등면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도 영광군 봉산면에서 일본군 기병 중위 등에 중상을 입히는 등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같은 해 봄 상장 김준이 일본군과 전투 중에 전사하고, 4월의 순창군 산막전투에서 후군장(後軍將) 백낙구 등이 전사함으로써 커다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던 중 조기채는 같은 해 5월 창평군 용흥사(龍興寺)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규모의 교전을 벌이다가 일본군이 쏜 탄환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8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해야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8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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