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大英
1890-02-2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대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에서 3,1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벌이다가 또 다시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위원군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앞뒤를 다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6일 예수교인을 중심한 수백 명 군중이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으며, 그 뒤 3월 10일에는 천도교인 수백 명이 읍내 교구실에서 동교 제1세 교조(敎祖) 순도기념식(殉道記念式)을 지낸 후 '조선독립'이라 쓴 큰 깃발을 앞세운 후 태극기를 들고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만세를 불렀다. 조대영이 어느 날 시위에 참여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로 인해 체포된 조대영은 1919년 4월 30일 신의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이후 조대영은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초산군(楚山郡) 참사(參事)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독판부는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국민들과의 연계를 위해 국내에 설치한 지방행정 제도인 연통부(聯通府)의 직제이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조대영은 초산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1921년 4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대정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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