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東傑
(1916)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동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경북도(咸鏡北道) 청진부(淸津府)의 청진중학교(淸津中學校)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군세(軍勢) 확장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한인 청년들의 징모(徵募) 활동에 주력하였다. 징모 제1분처는 이준식(李俊植)을 책임자로 산시성(山西省) 대동(大同), 징모 제2분처는 공진원(公震遠)을 책임자로 쑤이위안성(綏遠省) 포두(包頭)를 중심으로 군사 초모(招募) 활동을 벌였다. 김문호(金文鎬)를 주임 위원으로 한 징모 제3분처는 1941년 3월에 발족하였다. 징모 제3분처는 중국 국민당군 제3전구(戰區) 지역인 장시성(江西省) 상요(上饒)를 근거지로 초모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포로 심문을 통한 정보 수집, 항일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는 한편 한국 청년들에 대한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조동걸은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에 합류하여 조국 광복운동에 합류했다. 반전(反戰) 삐라, 염전(厭戰)사상 고취 전단, 일본군 귀순 통행증과 야전 방송기 등을 휴대하고 금화(金華) 지구로 진출하여, 선전물을 살포하고 대적(對敵) 방송을 하는 등 선전활동에 매진했다. 또한 항일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게 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1942년 10월 징모 제3분처가 푸젠성(福建省) 남평(南平)으로 후퇴하여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개편됨에 따라 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3월 김문호 등과 전선 각지에 파견 공작 중인 대원들을 순방 격려하고, 중국 제1유격 정진군(挺進軍), 미 공군 파견대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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