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文燮
(1882)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문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 12월과 1909년 6월 전남 광주군(光州郡)과 전북 순창군(淳昌郡) 등지에서 강사문의진(姜士文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남 장성 출신의 강사문 의병장은 1908년 1월 28일 김태원의진(金泰元義陣)에 투신했다가 약 한 달 후 귀가한 뒤 독자적인 의진을 편성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00명 내외의 의병을 지휘하며 전남 장성ㆍ광주ㆍ담양(潭陽)ㆍ나주군(羅州郡)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1909년 3월 총상을 입고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9년 7월 영산포(榮山浦) 헌병대에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17일 이른바 내란죄로 교형(絞刑)을 받고 순국하였다. 1908년 후반 강사문의진에 가담하여 그해 음력 12월 9일 의병 약 20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한치면(漢峙面) 원우리(遠隅里)에서 군량미 25석을 징발하였다. 1909년 6월 12일에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福興面) 비거리(碑巨里)로부터 이정리(梨亭里)를 잇는 큰길에서 현금 3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2년 9월 13일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에 의거 같은 해 12월 19일 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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