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福今
1911-07-07 ~ 미상·현대
이명·자·호 張敬淳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복금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6년 1월 26일 경상남도 진주(晉州)에서 여자잠업강습소(女子蠶業講習所)를 졸업한 후 고향인 하동에서 여성단체 및 청년단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가, 같은 해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28년 7월 1일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김한순(金漢順)·채소정(蔡小丁)·조필열(趙必烈)·강정회(姜貞會)·김점표(金點杓)·박삼모(朴三模)·조정희(趙貞姬)·김귀례(金貴禮)·신수명(辛秀明)·제영순(諸英順)·김보배(金寶培)·김은례(金恩禮) 등과 함께 근우회 하동지회를 조직하고 서무재정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24일 근우회 하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정치연구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6일 근우회 하동지회의 전국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6월 1일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 겸 여자부장(女子部長)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진(釜山鎭)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5월 27일 고광한(高光翰)·윤달선(尹達善)·임국희(林國熙)·제영순(諸英淳) 등이 주도한 ‘격문(檄文) 사건’에 연루되어, 불구속 기소되었다. 당시 부산시내 각 공장의 총파업을 계획 준비하였으며, 6월경 김태영(金台榮)·김병철(金炳哲)·윤달선·제영순 등과 함께 『노동자(勞動者)』라는 신문과 격문 약 150부를 인쇄하여 각 공장의 노동자에게 배포하였다. 이 일로 7월 16일경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에 체포되었다. 8월 5일 일명 ‘부산적색노동조합협의회(釜山赤色勞動組合協議會) 사건’으로 송치되어, 13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12월 1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출판법·보안법(保安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 같은 하동 출신으로서 함께 부산의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활동한 제영순·김계정(金桂正) 등과 함께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로 옮겨서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25일 대구에서 같은 하동 출신의 권대형(權大衡) 등이 조직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 참여하였다. 권대형과 서인식(徐寅植) 등이 발간한 기관지 『봉화(烽火)』, 『코뮤니스트』 등 출판물을 배포하고 전매국(專賣局)이나 고무공장 등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高等科)에 체포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32년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33년 8월 6일 ‘전북교원비밀결사 사건(일명 전북교원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하동으로 출장을 온 전주경찰서(全州警察署)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으로 하동의 김태순(金兌淳)·김경조(金京祚)·박성무(朴性武) 등도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조금복은 이 사건의 지도자인 조광호(趙光浩)와 전남동맹의 선동기(宣東基)·정영한(鄭永翰), 그리고 출옥 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이기택(李起澤), 지리산(智異山)의 한학자(漢學者) 김문옥(金文玉) 등의 사이에서 연락원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오랫동안 임실경찰서(任實警察署)에서 취조를 받은 후 1934년 4월 김태순·박성무 등과 함께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으로 송치되었다가, 5월 초순경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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