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相淵
1914-09-03 ~ 1939-12-22·일제강점기
이명·자·호 趙相運, 趙韓淵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상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20년 만주 하얼빈으로 망명하여 학업에 종사하다가 1932년 7월 남경(南京)으로 가서 박찬익(朴贊翊)의 알선으로 안휘중학(安徽中學)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33년 9월 중도 퇴학하였다. 1933년 9월 이후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가흥(嘉興) 등지에서 당시 장개석의 비호 아래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를 장악하고 있던 진과부(陳果夫)·진입부(陳立夫)가 조직한 비밀결사 C.C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지원받아 한인 독립운동가와 연계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하였다. 그 후 1934년 김구가 한·중(韓中)간에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투쟁 역량을 강회해 나가기 위해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蔣介石)의 후원하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조직하자, 동년 1월 엄항섭(嚴恒燮)의 권유로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던 도중, 9월 김구(金九)으 명으로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로 전학하여 1936년 7월 16일 제10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삼일 후인 19일 김구·엄항섭·차이석(車利錫) 등이 주도하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예비당원으로 입당하였고, 다시 일주일 후인 26일 엄항섭·안춘생(安椿生)·노태준(盧泰俊) 등과 더불어 한국국민당 청년단(靑年團)을 결성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자체 역량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7월 28일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육군 소위로 임명된 그는 중앙군 제14군 제10사단에 소속되어 8월 영현(泳縣)으로 출동하여 1개월간 경한선(京漢線) 지역에 소속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하였다. 그 후 1937년 8월 김구의 명으로 중국 군대를 이탈하여 그 해 9월 한국국민당 정당원으로 입당한 그는 1938년 2월 5일 김구로부터 한국국민당 인지특파원(印支特派員)으로 임명되어 같은 달 26일 천진(天津)으로 잠입하였다. 천진 잠입 후 안경근(安敬根)과 더불어 일본군의 군사정보 등을 수집하여 CC단 천진지부의 무전기를 이용하여 본부와 한구(漢口)에 거주하는 동지들에게 타전하는 등 한국국민당의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4일 천진의 영국조계 런던교 부근에서 천진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9년 9월 1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항적죄(抗敵罪)·간첩죄·군기보호법(軍機保護法) 위반으로 사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1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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